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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30 17:21 수정 : 2007.11.30 20:03

이름없는, 그들의 이름도 시가 되다

민족 구성원 3천명 시로 쓰는 작업 21년째…내년 3월 완간
24~26권 승려들 이야기 중심으로 역사·실존인물까지 담아

〈만인보 24, 25, 26권〉
고은 지음/창비·각 권 9000원

“살아서 다시 내가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삶을 위한 싸움의 서사시 외에 우리 민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그들의 선악을 막론하고 그려 내겠다는 구상 자체만으로도 황홀한 시간이었다.”


〈만인보 24, 25, 26권〉
고은(74) 시인이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서사시 <백두산>과 연작시 <만인보>를 구상한 일을 회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 그해 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혐의로 신군부에 체포된 시인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잔악한 고문 속에서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구하는 일”로서 시를 구상하는 데에 매달렸고, 그로부터 고은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두 대작이 출현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다룬 <백두산>은 1987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해 1994년 모두 7권으로 완간되었으며, 민족 구성원 1만 명을 시에 담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시작한 <만인보>는 1986년 첫 권이 나온 이래 20년 넘게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사이 애초의 1만 명은 3천 명 선으로 축소 조정되었고, 지난해 3월 4·19 혁명을 주로 다룬 제21~23권이 나온 데 이어 1년 8개월 만에 다시 24~26권이 속간되었다. 시인은 나머지 네 권의 초고도 이미 끝내 놓았다고 하거니와, 내년 3월이면 한국 문학은 물론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만인보> 프로젝트’가 전체 30권으로 완간될 참이다.

새로 나온 세 권은 신라에서부터 근현대까지 불교의 역사와 승려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꾸며졌다. 시인 자신 지난 시절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절집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 경력이 있는 만큼 불교와 승려들에 대한 이런 관심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시집 속에는 강화도 전등사 주지 시절(24권 <박동담>)과 해인사 시절(26권 <변설호>)의 일초 스님을 등장시킨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세 일초>(25권)라는 작품에서는 “나는 너”이고 “네가 나”인 것을 넘어 아예 “내가 누구면 뭘 하니 누구 아니면 뭘 하니”로 나아감으로써 일체분별을 여의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기도 하다.

승려가 아닌 ‘시인 고은’이 등장하는 시도 있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와의 일화를 다룬 <어느날 박용래>라는 작품이다.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 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박용래에게 은근히 ‘한 방 맞은’ 고은은 위악적으로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하나를 던진다. 그 바람에 냇둑의 새가 놀라서 날아가 버린다. 눈물의 시인은 그런 고은을 보며 울다가는 토하고 토하다가는 꾸짖는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만인보>에 그려진 승려들은 우선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저 유명한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의 해골 물 일화(<동과 서>)를 비롯해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 스님과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 스님이 선문답을 담은 서찰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겨루기를 했던 일(<서찰 육개월>), 바다 건너 불법을 전수해 벽안의 제자들을 키운 숭산 스님이 젊은 승려 시절 선객 고봉에게 수작을 걸었다가 결국 전법게를 받게 된 사연(<행원>), 만해의 상좌 춘성선사가 일제 경찰을 상대로 파격과 기개를 떨쳐 보인 이야기(<춘성>) 등이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산중의 고고한 수행 대신 저자에서 기와를 구워 백성들의 초옥을 기와집으로 바꾼 기와스님(<기와스님>)이나 “굶는 사람에게/ 밥 얻어다 주고/ 옷 없는 사람에게/ 옷 벗어”주며 “버려진 송장 장사지낸”(<장원심>) 키다리 스님처럼 속세에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며 예토에서 정토를 추구한 스님들도 있다.

<만인보> 24~26권에서 특히 힘주어 그려지는 것은 어용과 사대 및 친일 승려들과 민족 및 민중의 편에서 싸운 스님들 사이의 대비이다. “신라에 태어난 것을 날마다 탄식하”(<자장>)다가 중국 유학을 다녀온 자장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왕 앞에서 입에 발린 아부의 말을 일삼은 어용 승려들에 대한 야유(<법장과 혜인>)는 이회광을 비롯한 친일 승려들에 대한 가차없는 꾸짖음으로 이어진다(<그 두 사람의 수작> <친일승 몇 대> <변설호>). 이들의 반대쪽에 서 있는 것이 국난에 즈음해 떨쳐 일어선 승병들(<영규> <허백 명조> <벽암 각성>)이다. 요컨대 민족과 민중이라는 가치는 시인이 승려들의 미추와 선악을 가리는 유력한 기준으로 쓰인다.

승려들말고도 강진 유배 시절 다산 정약용의 숨겨진 여인과 딸(<다산의 마음> <홍임이>)이라든가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고려에 투항해 아들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길라잡이 노릇을 한 견훤(<견훤>) 같은 역사 속 인물, 그리고 ‘깐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던 ‘간첩’ 정수일씨(<정수일> <어린 수일이>)와 전두환(<전두환>) 등 생존 인물들 역시 등장한다.

이런 실존 인물들에 대비되는 이들이 잘날 것도 없고 크게 이름을 떨치지도 못한 장삼이사들이다. 이들은 거개가 시인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인물들이다. “이들은 한갓 개미나 나뭇잎사귀처럼 이름 없이 살다가 소멸해 버려 아무런 근거도 남기지 않았지만, 당대의 기록을 참조해서 그들의 삶을 복원시킬 수 있었다”고 시인은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죽은 민족이라도, 문학은 민족을 지켜야

지은이와 함께 /

“저는 기억의 노예이기도 하고 기록의 노예이기도 하죠.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자기화시키려다 보니까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만인보> 대장정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고은 시인을 지난 21일 만났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2층 초빙교수실에서였다. 시인은 지난 학기부터 이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씩 ‘고은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교양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생은 110명. 이날의 강의 주제는 지중해였다. 강의 초입에 시인은 “상상력은 우리를 구원할 최후의 언어”라고 말했다. 다음주가 종강이다. <만인보> 역시 끝이 보인다. 마지막 네 권의 초고 원고는 이미 출판사에 넘어가 있다.

“1980년에 감옥에서 구상했고 80년대 중반부터 내기 시작했으니까 늦어도 90년대까지는 끝냈어야 했는데, 제가 좀 해찰을 부리기도 했죠.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까 이렇게 시간을 가지고 쓰는 게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인물과 사건이라도 그때와는 좀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이점이 있어요. 문학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개입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10대 천재에게 더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내년 등단 50년 화가인생 시작
‘만인보’ 뒤 다른 대작시 구상도

그 역시 ‘조숙한 천재’였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며 공포와 허무에 몸부림치던 시인은 몇 차례의 자살 기도와 출가 및 환속을 거쳤으며 아직 승복을 입고 있던 1958년에 등단했다. 그러니까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이 된다. 특별한 계획이 있을까?

“제 어릴 적 꿈이 화가였어요. 전쟁 때문에 망가졌죠. 내년에는 다른 것보다 잃었던 화가의 꿈을 되찾아 보고 싶어요. 유화와 글씨 작업을 해서 인사동에서 전람회를 하려고 합니다. 추상의 극한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구상으로 가자니 그도 마땅찮고, 아마도 반추상 쪽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또한 <만인보> 이후의 또 다른 대작 시 구상 역시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다루려 합니다. 고대 아시아 사상과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 서구철학을 커다란 냄비에 넣고 같이 끓여 볼까 싶어요. 장시인데, 괴테의 <파우스트> 형이 될지 어떨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어요. 나는 언제나 계획을 배반하게 되니까. 운명으로서의 자동기술을 나는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다음주말 정기총회에서 명칭 변경을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한 생각을 물었다.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민족은 물론 100년 뒤에는 없어져야 할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추억으로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 추억을 문학이 저버리면 안 됩니다. 내 등짝에 찍힌 ‘민족’이라는 화인, 70~80년대에 나를 달군 형벌이자 화인인 민족을 제가 어찌 버리겠습니까? 죽은 민족일지라도 저는 그걸 지게에 지고, 그 위에 진달래꽃 하나 꽂고 산을 내려가고 싶어요. 물론 민족이 근대의 절실성에 의해 조작됐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이 우리에게는 숨쉴 공간이었어요. 민족이라는 이 비과학을 과학화해야죠. 선언하건대 나는 민족의 막내아들이자 세계의 고아입니다.”

최재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