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26 17:00
수정 : 2007.04.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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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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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엔가 도쿄에서 열린 ‘출판 비즈니스의 미래’란 동아시아 출판인들의 토론회에서 일본의 한 발표자는 “일본 만화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아시아 출판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발언을 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일본 만화를 무단 도용하여 자본을 축적했기에 오늘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힐난’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그러나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도 국외 저작물을 단순 복제해 판매하는 ‘리프린트’의 경험이 있는 마당이니 가슴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한때 우리 출판은 해외 출판물의 중복 출판이 너무 심각해 애초에 기획이란 걸 할 수 없었다. 저작권이 확보된 1990년대 초반 이후에야 우리 출판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다. 저작권은 출판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인프라다. 따라서 그 권리를 강화하자는 걸 출판 종사자가 앞장 서 비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런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기에 어떻게 개방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화, 나아가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지기에 묘수를 부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본 만화에 빗장을 완전히 열어준 지금, 만화 출판 시장에서 차지하는 우리 만화의 비중은 20% 안팎이다. 간간히 대형 학습만화 시리즈가 ‘대박’ 나기도 하지만 산업의 규모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일본 만화에 익숙한 세대가 성장하자 이제 일본 소설이 인기를 끌며 ‘일류’라는 말마저 등장했다. 몇몇 문학출판사를 제외하고 우리 소설을 출간하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드라마나 영화도 일본 만화의 발상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만화 캐릭터는 웹, 모바일, 영상, 게임 등과 연동해 수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일본에서는 유명 캐릭터를 이용한 고급 의류, 완구, 문구를 개발하는, 이른바 콜래보레이션(협업)을 통해 출판 비즈니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는 저작권 보호기간을 저작자의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늘렸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온라인 콘텐츠로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멍석’을 깔아준 데 있다. 콘텐츠 산업(CT)은 정보기술(IT)나 생명공학(BT) 이상으로 유망한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이 이번 협상에서 내심 노렸던 것은 이 저작권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우리는 정보기술에서는 어느 정도 인프라를 갖췄는지 몰라도 콘텐츠 확보에서는 그야말로 초보단계다. 이대로 외국자본에 돗자리부터 깔아주고 나면 우리는 결국 사랑방 신세는커녕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은 한심하다 못해 거의 만담 수준이다. 기존에 준비해 놓았던 것을 이참에 급하게 써먹는 터라 사태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음이 역력하다. 콘텐츠 부족 상황은 어떻게 알았는지 전국민 ‘1인 1책 쓰기’ 운동 같은 코미디 같은 대책마저 있다. 문광부는 피해액이 미세하다며 얼버무리지만 말고 하루빨리 근본적인 대책부터 수립해야 할 것이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