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국(上國)’과 ‘방언(方言)’이란 용어를 그대로 쓴 것에 대해 이상수 기자는 독자를 오도하며, 중국 중심의 황실사관이 투영된 어휘를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쓴 것이라 평했다. 이 기자는 반박 글에서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그야말로 독자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경우이며 … ‘상국’, ‘방언’ 등의 표현을 풀이글 없이 쓴 게 너무도 뜻밖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건 ‘충격’을 던져야 할 대목이라고 보아 위와 같이 기사를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번역과 소통의 맥락’이라는 제목으로 해명한 뜻이 이 기자에게 전혀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기자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내가 해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본래 ‘상국’은 동아시아 중세사회에서 중국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역자들은 이 책에서 ‘상국’이란 어휘를 세 번 썼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파견한 중국 군대를 따라 온 중국 문사가 자신의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두 번,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 의도로 쓴 ‘사천(射天)’이란 말을 풀이하면서 ‘상국을 굴복시키려는 음모를 의미한다.’라는 주석에서 한 번이다. 지적한 부분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문장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유의하여 이 용어를 쓴 의도를 재고하여 주기 바란다. 중세 한자문명권에서 ‘방언(方言; 특정 지방의 말)이란 ‘진서(眞書; 두루 통용되는 참된 글)’에 대응하여 쓰인 말이다. ‘방언’이란 원문을 그대로 쓴 것은 작자가 지닌, 중세 한자문명권의 보편적인 언어관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 기자는 “옛글을 옮기면서 오늘날의 쓰임과 다르거나 시대정신과 다른 낱말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해설하는 게 번역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주장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상국(上國)이란 어휘에 대해 “이번 번역본에는 원문을 옮기는 과정에서 ‘상국’이란 표현이 나온 대목 이외에, 번역자들이 쓴 원고인 주석에도 ‘상국’을 일반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거기에 아무런 풀이글도 없었다. 나는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그야말로 독자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경우라고 읽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언(方言)이란 어휘에 대해서는 “중국의 언어인 한문만이 진서(眞書), 참된 글이고 주변 국가의 말들은 ‘변방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중심적인 의식을 담고 있는 이 낱말 또한 중국 중세기 황실사관의 부스러기다. 원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하면 번역자는 그 역사적 쓰임을 충분히 풀이해줄 의무가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어에서 ‘방언’이란 ‘사투리’를 뜻하며, 이는 유몽인의 시대에 조선 선비들이 쓰던 ‘방언’이란 용어와 전혀 뜻과 맥락이 다르다. 이런 대목을 풀이하지 않는다면 번역자가 할 일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지적하였다. 나는 ‘상국’과 ‘방언’이란 어휘에 대한 이 기자의 지적이 기본적으로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떤 어휘의 의미는 일반적 함의 외에 특정한 문맥 내에서의 함의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국’이란 용어를 대부분 중국이란 말로 바꾸어 풀이하면서도 몇몇 대목에서는 이를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상국’이란 어휘가 그대로 사용된 문제의 문맥에서 이 용어가 ‘중국 중세기 황실사관’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쓰였다고 생각하는 이 기자의 판단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문맥에서 누가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가 하는 점이다. 아래에 문제의 어휘가 쓰인 대목을 제시한다. 만력 18년(1590)·19년(1591) 사이에 일본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 豊臣秀吉)이 사천(射天)할 뜻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신사를 요구하면서 험악하게 공갈하였다.(본문) <사천(射天) :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매달아놓고 우러러보며 화살을 쏘는 것으로, 위엄으로 귀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여기에서는 상국(上國)을 굴복시키려는 음모를 의미한다.>(주석 내용)(56면) 중국의 유사(儒士) 여영명(呂榮明)이 우리나라가 의복 제도를 바꾸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애석해 하며 말했다. “제가 상국(上國)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옛 기물과 옛 의복을 모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네 나라에서 날마다 쓰는 그릇 및 크고 작은 겉옷과 속옷의 제도는 모두 당나라 때의 제도를 본뜬 것이기에 자못 옛사람의 풍모가 있습니다. 지금 상국(上國)의 의복 제도는 매우 좁고 또 사치스러우며 그릇 또한 옛것이 아니어서 당신네 나라의 예스럽고 소박한 제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각기 그 풍속을 따름이 마땅하지, 반드시 본뜰 것은 아닙니다.”(442면) 중국 문사가 자신의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 두 번째 인용문(442면)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파견한 중국 군대를 따라 온 여영명이란 중국 문사가 자신의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쓴 것이다.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견주어 자신의 나라(명나라)를 높이어 ‘상국’이라 지칭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기자는 첫 번째 인용문(56면)의 주석에서 ‘상국’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다 문제시 했다. 여기에서 ‘상국’이란 용어는 주석을 단 번역자들이 사용한 어휘라는 점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풍신수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공갈한다는 맥락에서 쓴 ‘사천(射天)’이란 용어를 풀이하면서 쓴 말이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번역자들이 ‘상국’이란 용어를 쓴 의도는 풍신수길이 조선이 아닌 명나라를 치려는 허황된 야망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공갈 협박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명분을 삼은 풍신수길의 의도를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마치 번역자들이 중국 중심의 황실사관에 사로잡혀 있으며,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싶다. 중세 문명권 지식인 의식세계 곡해하면 안돼 다음 방언(方言)이란 어휘의 문제이다. 이 용어가 중세 한자문명권에서 진서(眞書; 한문)에 대응하여 우리말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밝혔다. 이 기자는 “오늘날 한국어에서 ‘방언’이란 ‘사투리’를 뜻하며, 이는 유몽인의 시대에 조선 선비들이 쓰던 ‘방언’이란 용어와 전혀 뜻과 맥락이 다르다.”고 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방언이란 것도 중심 지역의 표준어와 대립하는 변방 지역의 사투리란 의미를 담고 있는바, 굳이 그 용어의 뜻과 맥락이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도지 않는다. 우리가 중세 보편주의 문명권의 지식인에게서 근대 민족주의적 의식을 찾으려는 의도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시각이 획일시되어 중세 문명권에서 살아간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곡해하는 데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족주의적 시각이 없어 중세 보편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근대 민족주의적 시각을 당대의 세계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기자는 “번역문에서 ‘방언’이란 표현을 그대로 노출시켜두면 전공자가 아닌 독자는 ‘사투리’란 뜻으로 읽을 것이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원작에 담긴 작가의 의식세계”를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겠는가. 이런 번역이 독자를 오도(誤導)하는 길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과연 독자들이 그렇게 오도할 만한 것인지, 장황하지만 번역본에서 ‘방언’이란 어휘가 쓴 예를 아래에 전부 제시한다. (김시습은) 오 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오세(五歲)라고 자호하였는데, 방언으로 오세(傲世: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본다는 뜻)와 음이 같았다.(49면)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중국의 지명은 모두 문자(한자를 말함)를 쓰기에 시인들이 이를 이용하여 대구를 짓는다. 불야성(不夜城)과 무풍새(無風塞), 황우협(養牛峽)과 백마강(白馬江), 황고저(黃姑渚)와 백제성(白帝城), 황초협(黃草峽)과 적갑산(赤甲山), 어룡천(魚龍川)과 조서곡(鳥鼠谷), 오만(烏蠻)과 백적(白荻), 봉지(鳳池)와 인각(麟閣) 같은 것들은 모두 청백(靑白)으로 짝하여 지명에 따라 얻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방음(方音)으로 지명을 쓰기에 시어로 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 이를 힐난하는 자가 있어 말하였다. “이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지명에도 도처에 짝할 것이 많다. 우봉(牛峰)과 토산(兎山), 청산(靑山)과 황간(黃澗), 용강(龍崗)과 어천(魚川), 청암(靑巖)과 벽사(碧沙), 나주(羅州)와 금산(錦山), 진산(珍山)과 보성(寶城), 두모(頭毛)와 안골(安骨), 연기(燕岐)와 홍산(鴻山), 부산(釜山)과 발포(鉢浦), 오수(獒樹)와 계림(鷄林), 노강(老江)과 소농(少農), 금정(金井)과 석성(石城), 목천(木川)과 초계(草溪), 음성(陰城)과 양천(陽川) 등 이 같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방언으로 칭한 곳은 노루목[老奴項]과 배암골[背巖洞], 고령사(高嶺寺)와 구리개[求里街], 당파항(唐陂巷)과 한정동(漢井洞), 미조항(彌助項)과 수리령(愁里嶺) 같은 것이 지역마다 있다. 다만 우리나라는 시인이 적기에 시 가운데에 이 같은 대구가 드문 것이다.” 이에 그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410면) “공은 골계를 잘해 비방을 받는데도 오히려 경계하지 않는구려. 지금 이후로는 그만두는 것[權停]이 좋겠소.” 자하(紫蝦)를 방언으로는 곤쟁이[權停]라고 했던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444면) 대개 속명으로 참깨[眞荏]라고 하는 것은 방언으로는 호마자(胡麻子)인데 마치 흰 이[白虱]처럼 생겼다. 그 즙을 취하면 향기로운 기름을 만들 수 있고, 또 벌레의 독을 제거할 수 있다.(744면) 이상 네 차례 쓰인 ‘방언’은 모두 한자에 대응하여 우리말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것이 사투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독자를 오도(誤導)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판단에 맡겨두고자 한다. 한자에 대응하여 우리말이란 의미로 씌여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번역어의 선택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는 필자가 이 기자와는 다소 다른 번역관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연유한 듯도 싶다. 고전의 번역은 매우 상이한 시대의 인식론적 지층 사이를 매개하는 일이다. 유몽인을 포함하여 그 시대 지식인들의 세계 이해에서 중화중심의 관념이 내재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우야담>의 문장과 어휘들에도 이러한 사유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대목과 마주칠 때 번역자로서는 고전을 대중들에게 소통시킬 때에 이러한 어휘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고심하곤 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북한과 남한의 고전 번역의 차이점을 떠올려 본다. 북한의 고전 번역본은 대부분 대중과의 소통을 가장 우선하여 많은 고전의 어휘들을 의역하여 현대어로 풀어쓰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남한의 번역본은 주 독자층을 어떻게 상정하는냐에 다라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 비해서는 고전의 어휘를 그대로 되살려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번역자들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문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역자들은 고전의 번역을 통해 현대 대중들과의 소통을 매개하면서도 원작에 담긴 작자의 의식세계를 손상시키지 않고자 노력하였다.”고 말한바 있다. 역자들의 판단으로는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번역이 정직한 번역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오늘날 독자들과의 인식론적 단절이나 거리가 존재할 터이지만, 독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원근법적 독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번역자들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또 하나 필자가 다소 욕심을 부린 점은 활용이 가능한 고전의 어휘는 살려보자는 것이었다. 이기자는 ‘이미 죽은 옛말’이라고 단정을 하였으나 일부는 아직 쓰이고 있으며, 요즘에 발간된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용어들이다. 어휘는 사용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잊혀지게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고전과의 거리는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풀이말을 달지 않은 점에 대해 번역자들이 사려 깊지 못했다는 지적은 수긍할 수 있으나, 어휘적 차원에서나마 고전과의 간극을 줄여보고자 했던 필자의 의도가 곡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2. 이 기자가 <장자> 인용문 중 오역임을 밝힌 것은 두 대목이다. 177화 ‘한유의 교묘한 글 솜씨’와 231화 ‘정호음과 어숙권의 박식함’ 중 <장자>를 인용한 대목의 해석이 그것인데, 여기에 오역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겸허하게 이 지적을 수용하며 이 기자의 박식함에 감탄하는 바이다. 다만 오역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 약간의 변명을 하고자 한다. 오역 지적은 정확하나 그 경위를 변명하면… 177화 ‘한유의 교묘한 글 솜씨’는 번역문이 길지 않기에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유(韓愈)의 글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는 ‘나무는 산에 있고, 말은 마굿간에 있다’로 첫머리를 시작하였는데 그 끝맺음을 단지 ‘말[馬]’로써 마무리 지었다. 선유(先儒)들은 그 글에 빠진 문자가 있지 않나 의심하였는데, 내가 〈장자(莊子)〉를 읽다가 「마제(馬蹄)」편에 이르러 보니 말[馬]과 나무 심는 것[植木]으로 서두를 시작하고 그 끝맺음에는 단지 말[馬]을 언급하면서 그 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한퇴지는 고문(古文)을 잘 옮겨 썼으니, 그 뜻을 취하고 그 말은 취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는데 선유의 식견이 혹 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인가? (308면) 이 기자는 밑줄 친 부분 중에서 ‘말[馬]과 나무 심는 것[植木]으로’라는 부분이 “‘말(馬)과 ‘진흙(埴)’과 ‘나무(木)’로”로 정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 ‘마제’편을 펴서 확인해본 결과 이 기자의 지적이 옳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은 번역자들의 실수임이 명백하다. 다만 해당 글의 첫머리에서 “한유(韓愈)의 글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는 ‘나무는 산에 있고, 말은 마굿간에 있다’로 첫머리를 시작하였는데 그 끝맺음을 단지 ‘말[馬]’로써 마무리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해당 대목의 원문이 여러 이본에 모두 “以‘馬及植木’起頭”이라고 하여 ‘나무심는 것’(植木)이라 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 ‘말과 나무 심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해당 원전을 확인하지 않아 오역으로 이어진 것은 명백한 잘못임을 인정한다. 231화 ‘정호음과 어숙권의 박식함’에 대해 이 기자가 지적한 대목은 다음이다. 고서(古書)에 ‘밤에 닭이 울면 세상이 반드시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장자(莊子)〉에도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라고 한 것입니다. <주석>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 : 〈장자(莊子)〉 「재유(在宥)」편에 나오는 말로, “鴻蒙曰: 亂天下之經, 逆物之情, 玄天弗成. 解獸之群, 而鳥皆夜鳴. 災及草木, 禍及止蟲. 噫, 治人之過也.”라 하였다.(384면)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 수준’ 논법은 부당 이 기자가 오역임을 지적한 대목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의 원문은 “解戰[獸](청·고·국)之群鳥, 皆夜鳴.”이다. ‘戰’자가 청구패설본·고대본·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獸’자로 되어 있으며, 주석에서 밝힌 대로 〈장자(莊子)〉 「재유」편의 원문에도 ‘獸’자로 되어 있다. 주석에서 해당 부분의 〈장자(莊子)〉 원문이 “解獸之群, 而鳥皆夜鳴”라고 밝혀놓고도, 이렇게 해석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임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 대목을 두고 역자들을 비판한 이 기자의 지적에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 있어 이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 기자는 “1996년 한국문화사에서 펴낸 시귀선·이월령 역주 <어우야담>도 이 구절을 “장자도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라고 말하였으며…”(451쪽)라고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10년 전에 나온 해석서의 잘못이 신 교수 등의 번역서에서도 바로잡혀지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런 대목에서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이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전거(典據)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대목조차 주석서를 찾아보는 수고를 게을리 해 잘못을 10년째 되풀이하고 있다면, 전거도 없는 대목에선 도대체 어떤 억측과 예단이 벌어질지 마음을 놓을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기존의 <어우야담> 번역서는 <장서각본>을 대상으로 번역한 한국문화사에서 펴낸 위의 책 외에 전통문화연구회에서 간행한 <만종재본>을 완역한 <어우야담>(이충구 외, 2003년)이 있다. 이 기자의 지적을 받고 확인해보니, 이 책에서는 “〈장자(莊子)〉 「재유(在宥)」편에 이르기를, ‘짐승의 무리가 흩어지고 새가 모두 운다’ 하였으며…”라고 하여,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정확한 번역이 있는데도,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오역한 것은 순전히 우리 번역자들의 잘못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목에서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이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전거(典據)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대목조차 주석서를 찾아보는 수고를 게을리 해 잘못을 10년째 되풀이하고 있다면, 전거도 없는 대목에선 도대체 어떤 억측과 예단이 벌어질지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라는 지적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6여년의 오랜 시일 끌며 번역하다 보니 실수도 필자는 우선 이기자가 우리의 번역본을 꼼꼼하게 읽고 오역을 지적해준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만일 개정판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명확한 오역에 대해서는 바로잡고자 한다. 필자는 머리말에서 완벽한 번역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독자 제현께서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바 있다. 번역자들로서는 뼈아픈 실수지만, 이러한 우정어린 충고를 해준 형안의 독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다만 섭섭한 점은 이기자의 논법이다. 역자들의 잘못을 두고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으로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평가한 것은 다소 지나치지 않는가? 필자가 최초 해명이 필요하다고 여긴 이유도 직접적으로는 이와 같은 논법에서 기인한다. ‘상국’이나 ‘방언’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면, 번역자들은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세시대의 사람이며, 중국을 추종하는 사대적 지식인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이기자가 희망하는, 그리고 번역자들도 적극 찬성하는 ‘우리 출판문화와 학술연구에 발전’을 위해서는 좀더 명료하게 시비꺼리의 범위와 책임의 소재가 지적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이 기자의 지적을 받고서 나는 역자들이 작업해 온 과정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역자들은 <어우야담>이란 고전이 지닌 가치에 주목하여, 27종의 이본을 찾아내고 이를 대비하여 정본(定本)을 확정하며, 이에 근거하여 정확한 번역을 하고자 했다. 여러 이본을 입수하는 과정에서 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본 간의 차이점을 한 글자 한 글자 대비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6년여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처럼 오랜 시일을 끌며 공동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중간에 이 년 가까이 작업이 중단된 적도 있었고, 일부 내용은 컴퓨터 고장으로 그동안 해왔던 것을 분실해 다시 번역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랜 시일을 끌며 번역하다 보니, 주석을 달고 원전을 확인하는 과정이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되지 못해 이런 실수가 빚어진 것 같다. ‘학자적 양심 요구’ 지적에 씁쓸함 이러한 역자들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번역자들이 어떤 <장자> 주석서든 아무 것이나 하나만 뒤적여봤더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런 수고조차 게을리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라거나,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라는 이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이 기자에게 우리 나름대로 행한 수고와 양심을 보여주기 위해, 아래에 역자들이 단 주석 몇 가지를 유형별로 소개해 본다. <장자> 관련 주석은 전부 제시하고, 여타 주석은 몇몇 사레만 열거한다. (1) <장자> 관련 주석 * ‘그 아들에게 보호받지 못해 영공(靈公)이 빼앗아 여기에 묻는다’라고 했으니, 영공의 혼령됨이 오래 되었다 : 〈장자(莊子)〉 「칙양(則陽)」편에 나오는 말이다. 위령공이 죽자 옛 무덤을 장지로 정하려 하니 불길한 것으로 점쳐졌고, 모래 언덕에 장지를 정하려 하니 길한 것으로 나왔다. 몇 길을 파 들어가니 석곽이 나왔는데, 그 석곽에 “그 아들에게 보호받지 못해 영공(靈公)이 빼앗아 여기에 묻는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위령공 이전에 이미 같은 호칭을 쓰는 다른 영공(靈公)이 동일한 묘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288면) * 이지유지지비지 불약이비지유지지비지야(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이마유마지비마 불약이비마유마지비마야(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로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아닌 것을 비유함은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닌 것을 비유함만 못하고, 말을 가지고 말이 아니라고 가르침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이다.(419면) * 병벽광(洴澼絖) : 표백솜을 가리킨다. 송나라 사람과 표백솜에 대한 이야기는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보이니,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以百金. 聚族而謀曰: ‘我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鬻技百金, 請與之.’ 客得之, 以說吳王. 越有難, 吳王使之將, 冬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能不龜手, 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이라 하였다.(498면) * 하늘의 소인이 인간 세상의 군자요, 인간 세상의 소인이 하늘의 군자이다: 이는 〈장자〉 의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말로 자공이 기인(畸人)에 대해 묻자, 기인이란 인간세계에서는 기이하지만 하늘의 도에는 어울리는 사람이다(子貢曰: “敢問畸人?” 曰: “畸人者畸於人, 而侔於天.”이라 한 대목 뒤에 이어지는 말이다.(704면) * 가을 터럭도 크다고 할 수 있고, 태산도 작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천하에 가을 짐승의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태산은 작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장수한 자는 없고, 팽조도 일찍 죽었다고 할 수 있다.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大山爲小, 莫壽於殤子, 而彭祖爲夭.)”라는 구절이 있다.(781면) (2) 이야기의 인명을 바로잡은 경우; 수십 개에 이르는 중 세 가지만 제시함. * <만종재본>에는 ‘채수(蔡壽)’로 되어있는데, 여러 필사본에는 채세영(蔡世英)에 관한 일화로 기술되어 있다. <야승본>에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公以己丑壯元, 直拜監察, 未曾爲翰林, 此等云云, 必出於傳聞, 恐未可盡信耶.”라는 대목이 추기되어 있다. 기축년은 1469년으로 이 때 장원을 한 이는 채수이고, 채수는 곧바로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았다. 이에 비해 채세영은 정축년인 1517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19년 예문관 검열을 지낸 바 있다. 포쇄별감은 예문관 검열이 지내는 임시직이라는 점과 <야승본>의 기록을 고려 할 때 이 일화는 채세영에 관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69화 ‘포쇄별감 채세영의 눈물’ 141면) * <만종재본>에는 홍춘경(洪春卿)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 필사본에는 홍춘년(洪春年)으로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홍춘경은 청직을 두루 역임하고 예조와 이조의 참의직을 지낸 인물이며, 아우 홍춘년은 여주·나주·강릉 등지의 목사직을 역임했다. 홍천민(洪天民)은 홍춘년의 형인 홍춘경의 아들인데, 뒷부분에서 ‘그의 조카인 승지 홍천민(洪天民)’에게 말했다는 표현으로 볼 때, 홍춘년이 맞는 것이기에 필사본의 기록을 따랐다.(44화, ‘시정인 박계금의 패가망신’ 104면) * 장창(張蒼) : <만종재본>에는 ‘張昌’으로 되어 있고, 여러 필사본에는 ‘張蒼’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창(張昌)은 중국 진(晉)나라 사람으로 용력이 빼어났으며, 이류(李流)가 촉(蜀)나라를 치자 잠적해 무리를 모아 겁탈을 일삼았으며, 성명을 이진(李辰)이라 바꾼 뒤 구침(丘沈)을 거짓 천자(天子)로 세우고 자신은 상국(相國)이 된 인물이다. 장창(張蒼)은 중국 한나라 때 인물로 늙어 이가 다 빠진 후에도 100살이 지나도록 젊은 청년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정승의 벼슬을 지냈다는 인물이다. 여기에서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후자의 인물이 맞는 것으로 여겨져, 필사본의 기록을 따랐다.(82화 ‘지리산의 신선’ 162면) (3) 출전을 확인해서 제시한 경우 * 정건(鄭虔) : 당(唐) 현종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광문관박사(廣文館博士)를 삼았는데, 이는 정건의 뛰어난 능력에 비해 낮은 미관말직이었다. 두보는 「취하여 부르는 노래(醉時歌)」를 지어 그의 불우함을 개탄한 바 있다. 이후로 정건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불우하게 지내는 인물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는데, 이 시에서도 친우 정상의의 불우함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였다. (332면) * 두보는 가만히 직(稷)과 설(契)에 자신을 견주었다: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란 시에, “두릉에 한 선비가 있으니, 늙을수록 뜻은 더욱 졸렬하여라. 자신 허여함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그윽이 후직과 설에 비한다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穮與契.)” 라는 내용이 보인다.(342면) * 어떤 장군 : 이 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장군의 이름이 양조(楊照)라 밝혀져 있다. 양조는 명나라의 장군으로 요동총병(遼東總兵)으로 있을 때 적군이 광녕새(廣寧塞) 밖에서 쳐들어오자, 밤중에 이를 기습하러 나갔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명사(明史)〉 권328 참조)(368면) * 풍수(灃水)를 들이마시고 호수(鎬水)를 토해냈다: 이 대목은 〈문선〉에 실려있는 반고(班古)의 「동도부(東都賦)」와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서 따온 것이다. <만종재본>에는 ‘欱野嘖山’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선〉에는 ‘欱野歕山’이라고 되어 있다. 〈문선〉의 주에서 “説文曰: ‘欱啜也, 歕吹氣也.’”라고 하였으며, 歕은 ‘噴 ’과 같은 자라고 하였다. 또한 ‘欱澧吐鄗’가 장형의 〈서경부〉에는 ‘欱澧吐鎬’‘라고 되어 있다. (639면) (4) 모르는 사항을 미상으로 처리한 경우 * 처음에는 최포향(崔蒲鄕)의 정장(亭長)이었는데 녹림(綠林) 현감으로 옮겼다가 황주(潢池) 부사로 승진했소: 여기에서 최포향, 녹림, 황주는 가공으로 설정된 지명으로 보인다. 최포향(崔蒲鄕)은 미상이나, 녹림(綠林)은 도둑의 소굴을 일컫는 말이고, 황지는 ‘弄兵潢池’라고도 하여 바닷가 먼 변방의 굶주린 백성들이 황지에서 도적떼가 됨을 말한다. 〈한서〉 「둔리전」에 “海瀕遐逺 不霑聖化 其民困於饑寒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盗弄陛下之兵於潢池中耳”하 하였다.(132면) * 호광(胡廣) : 호광은 중국 사람으로 여겨지니, 후한 때 상서랑(尙書郞)ㆍ사도(司徒) 등의 벼슬을 지낸 이와 명나라 때 한림수찬(翰林修撰)ㆍ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 등을 지낸 인물이 있으나, 부모가 버린 고사에 대해서는 미상.(280면) * 애초에 정(鼎)씨 성을 가진 자가 있어 이 체를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대개 과두와 고전(古篆)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미상.(477면) * 구성(龜城) 굴암사(窟岩寺) : 구성은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지역이며, 굴암사는 미상. (643면) * 영릉(零陵)에서 슬프게 빠져죽은 백성 : 영릉(零陵)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남부에 위치한 영주시(永州市)의 옛 이름. ‘영릉(零陵)에서 슬프게 빠져죽은 백성’은 미상.(674면) * 수암사(峀岩寺) : 수암은 개주(盖州) 근방에 있는 지명으로 확인되며, 수암사는 미상.(806면) 3.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반론과 해명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기자의 의도가 우리의 번역 방식만을 두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라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해명하게 된 것은 번역본을 읽지 않은 일반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함에서였다. 마지막으로 이 기자가 우리의 번역 수준을 중국과 비교해서 평가한 부분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면서 글을 끝맺고자 한다. 대부분의 번역시장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이 기자는 “중국은 한국에 비해볼 때 1인당 지디피(GDP)가 1/5이나 1/10 수준이다. (물론 경제 지표가 다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중국에서 출간되는 주석서의 노작(勞作)들은 정말 ‘노작’이라는 이름값을 한다. 이런 노작들은 찾아보아야 마땅한 문헌은 빠짐없이 찾아보고 이를 해석과 평가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보면 이번 <어우야담>의 주석 작업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나는 생각했다.”라고 했다. 필자는 한국한문학을 전공하기에, 중국 주석서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기자의 지적대로 중국의 주석서가 한국의 번역서에 비해 수준이 높다는 데에는 공감하며, 역자들의 <어우야담> 번역서가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충분히 인정한다. 나는 여기에는 경제 지표나 주석자들의 열성과 노고만으로 단순 대비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중국은 완벽한 주석서를 출간하기까지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며,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 학계에서는 번역서에 대해 평가가 매우 미미하다. 대부분 번역서는 일반 논문 한 편보다도 못하거나, 기껏해야 동등한 비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번역서에 대한 평가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열성과 노고를 바치려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번역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으며, 국가 적 차원에서 고전 번역을 체계적으로 점검하며 지원하는 시스템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주요 고전에 대한 교감을 수반한 수준 높은 번역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며, 우리의 번역 수준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