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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기술속사상] 현대기술아 제발 ‘닦달’하지 마/손화철

등록 :2006-04-20 21:41수정 :2006-04-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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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가 아닌 존재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그 존재의 망각이 도달한 극단의 모습이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가 아닌 존재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그 존재의 망각이 도달한 극단의 모습이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 ‘도구 이상의 그 무엇’ 첫 사유 “현대기술의 본질은 닦달(강요)” 주장
자연에게는 자원 내놓으라고 인간에게는 부품이 되라고 채근
씨를 다그치지 않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존재의 드러냄’ 기다려야

기술 속 사상/②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돌도끼로부터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손에서 기술이 떠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수천 년 철학사에서 기술이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묻지 않아도 될 법한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도 “~란 무엇인가” 혹은 “왜 ~한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철학자들이 기술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기술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하면, 더 이상 물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의 주체인 인간이나 사용의 목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철학이란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 (1889-1976)가 기술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20세기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상가다.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 이후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렇게 중요한 철학자가 여태껏 외면당하던 기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니 철학의 무대에서 기술도 마침내 한 번 뜬 셈이다.

물론 그가 아무 계기도 없이 기술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기술의 급격한 발달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882년에 에디슨은 뉴욕시에서 최초의 전등을 켰고, 1886년에는 최초의 자동차가 제작되었으며,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무성영화는 그가 태어난 뒤에 각각 발명되었다. 이들 분야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외에도 핵폭탄, 컴퓨터, 텔레비젼 등 우리 시대를 바꾼 수많은 기술들이 그가 살았던 시절을 장식했다.

산업혁명기 체험이 ‘탐구’ 계기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정밀한 이론적 철학에 근거해서 현대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기술에 대한 논구>라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닦달”(Ge-stell)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 놓으라고 강요(닦달)한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린다. 강물은 수력 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일 뿐이고 울창한 숲은 신문을 만들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옛날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씨가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잘 돌보는 것이다.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강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기술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인간적, 도구적 정의가 맞기는 하지만 기술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 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기술이 현대에 와서 닦달의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기술과 하이데거 존재철학의 연결점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이 언제나 존재자, 즉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지 동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신, 인간,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있는 것”들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동사적 “있음”에 대한 관심, 즉 그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점점 약해졌다. 플라톤이 모든 사물의 이데아, 곧 불변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나,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의 본성을 물으려 했던 것은 “있음”보다는 “있는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시즘·나치즘, 인간을 도구화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 훨씬 더 심화되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의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기술이다. 현대기술의 태도는 씨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돌보는 농부보다는 농약을 뿌리고 온도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임의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억지로 높이는 식품생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의 “닦달”이다.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눈부신 성취 가운데 공허하고 지배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속에 권태롭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를 대상화했는데, 결국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았다.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았다.

기술사회의 끊임없는 닦달과 팽창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닦달이, 존재가 기술시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에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나치즘과 현대 시장 자본주의에서 현대기술의 닦달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지배의 추구 속에 인간이 인간을 비인격적 도구로 취급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률은 하이데거의 눈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하고 인간의 주체성만을 강조한 결과가 현대기술이라면,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다시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돌보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그 드러냄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존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은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애착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한다. 예술을 통해 예술가를 초월하는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기술철학’ 핵심

손화철/성균관대학교 강사·기술철학
손화철/성균관대학교 강사·기술철학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극과 극을 달린다. 현대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통으로 지적한 사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술에 대한 아무 실증적 근거도 없이 비관주의, 회의주의에다 신비주의까지 엮었다는 혹독한 평가도 있다. 존재의 드러냄을 기다리고 가꾸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도 않거니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환경윤리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자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여러 상반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이데거를 통하여 철학에서 기술의 문제가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처럼 현대기술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정면으로 씨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를 기술철학의 핵심 사상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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