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
린지 아다리오 지음, 구계원 옮김/문학동네·1만9800원일과 행복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이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 일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소명의식이 있다면 행복감은 배가되고, 다른 이가 대체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면 우주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세 조건에 대체로 부합하는 희귀 직종 종사자인 린지 아다리오가 자전적 에세이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에서 여러 차례 “종군기자라서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그가 유별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조금 뜻밖인 대목은 그가 종종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자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11년 3월 ‘아랍의 봄’을 취재하러 간 리비아에서 세 명의 동료기자와 함께 카다피군에 납치됐을 때, 아다리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왜 사진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카메라 대신 펜을 든 아다리오는 놀라운 필력을 발휘하며 할리우드 전쟁 블록버스터를 방불케 하는 아찔한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평소보다 늑장을 부렸던 아침, 불안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카메라 뒤에 얼굴을 숨기고 촬영하던 순간, 분쟁지역에서 가장 늦게 철수하는 프랑스 기자들마저 떠나고 덩그러니 남았을 때 밀려든 공포감, 카다피군의 총격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다 붙잡힌 후 손발이 묶이고 무릎 꿇린 채 죽음을 목전에 두기까지!
긴박한 전개로 읽는 이를 숨가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아다리오는 다음 순간 시침을 뚝 떼고는 미국 코네티컷주 웨스트포트에 있는 집 마당의 작은 수영장에서 세 명의 언니들과 벌거벗고 수영하던 평화로운 어린 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그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은 것은 열세 살 무렵, 아버지에게 니콘FG모델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빛과 셔터로 특정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과학에 매료된” 그는 독학으로 흑백사진 촬영과 인화 방법을 익히며 가는 곳마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취미로 즐기던 사진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남미 여행을 갔다가 지역 영자신문인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무렵 열린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전>을 보고, 그는 보도사진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살가두는 어떻게 피사체의 존엄성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을까? 이전까지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사진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진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여행과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호기심, 사진이 결합된 장르, 그것이 바로 보도사진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종군기자로 나선 것은 9·11테러 직후다. 2001년 9월21일, 파키스탄에 도착한 그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전쟁까지, 최전방을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이라크에서 보낸 시간을 계기로 아다리오는 “목숨을 걸고 대중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취재하는 사진기자”로 거듭났다. 그와 동료들은 “이라크에서 찍은 처참한 사진들로 미국의 정책입안자와 시민들이 이라크 침략전쟁이 실패였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고, 이는 그가 계속 종군기자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늘 두 개의 전선에서 분투했다. 하나는 총성 가득한 실제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여성 차별과 억압’의 전선이다. 리비아에서 카다피반군에게 납치되던 날, 경험 많은 종군기자였던 아다리오가 다가올 위험을 감지했음에도 동료들에게 “철수하자”는 말을 못한 것은 그가 일행 중 유일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약한 여자라서 동료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인데, 그런 이유라니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실제로 그는 종군기자로 일하던 초기, 아프가니스탄에서 함께 탈레반을 취재하기로 했던 남자 동료에게서 “당신이 여자라서 취재에 제약을 받으니 갈라서자”는 말을 들었다. 처참한 상황에 울거나 흥분하거나 먼저 현장을 떠나는 남자는 위로와 격려를 받지만, 여자는 “감성적이라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최전방에 갈 때 필요한 방호복이나 헬멧은 모두 남성용이라, 키가 155센티미터인 그에게는 안전장비가 되어주지 못한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그의 몸을 더듬는 손이 열 개인지 스무 개인지 모를 때도 많은데, 이런 성추행에는 아군과 적군의 경계도 없다. 임신과 출산은 경력단절과 현장배제를 의미하므로, 2007년 당시 아프간전쟁 취재에 나선 여성동료 엘리자베스 루빈은 몇 개월이나 임신 사실을 숨긴 채 군인들과 함께 행군했다.
한편 여성으로서 그는, 전쟁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전선에 기꺼이 연대해 왔다. 콩고 내전을 취재하러 간 아다리오는 성폭행이 ‘전쟁의 무기’가 된 현실을 고발하고 강간으로 몸을 다친 여성들과 임신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존 여성들을 돕기 위한 사진전을 열었다. 이슬람 여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부르카가 아니라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몸을 꽁꽁 싸맨 그들 안에 열정과 기쁨이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으며 내 피사체들과 생존의 기쁨이나 억압에 저항하는 용기, 상실의 비통함, 억압받는 자의 끈기를 나누었으며, 가장 추악한 인간의 잔인함과 가장 훌륭한 선의를 지켜보았다.” 그가 목숨을 걸고 사진 찍는 까닭은 그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