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박람회를 찾은 한 고등학생.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취업박람회를 찾은 한 고등학생.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표준국어대사전>은 ‘낭비’를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이라고 정의한다. 스물세살 노동자 한수정(가명)에겐 대학이 그랬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데 대학에 다니는 것은 낭비죠. 돈이나 벌자고 생각했죠.” 부산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던 한수정은 학창 시절부터 뷔페에서 ‘알바’를 했다. 그 뒤로도 공장 네곳과 식당 등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한때는 공장에서 퇴근한 뒤 뷔페 저녁타임 일을 하는 ‘투잡’을 뛰기도 했다. 지금은 부산의 한 물류회사에서 주 6일, 하루 8시간씩 일한다. 그런데 근무시간이 밤 9시에서 아침 6시, ‘야간조 고정’이다. 밤에만 일하는 덕에 수당을 더해 한달에 300만원 정도를 번다. 한수정은 불면 증상을 겪으면서도 주간조로 일할 생각은 없다. 지금 월급에 “되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한수정이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는 나이 들어서까지 열심히 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을 하면 나중에는 몸이 못 견딜 것 같아요. 저는 일단 지금은 되게 힘들게 일하고 나중에는 되게 편하게 살고 싶어요. 건물주가 돼서 세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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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공부는 낭비…5층 건물주가 꿈”

한수정의 꿈은 5층짜리 건물을 가지는 것이다. 1층은 무조건 자동차 튜닝숍을 하게 할텐데, 그곳은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전수찬(가명)의 몫이다. 다른 층에는 피시방과 멀티방, 카페 등을 세줄 것이다. 옥상에는 친구들과 함께 밤새 왁자지껄 놀 수 있는 캠핑 공간을 만들 생각이다.

그런 한수정의 꿈을 이루는 데 대학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학 진학보다 고졸 취업이 낫다고 했다. “일단 대학 간 애들보다 돈을 더 모을 수 있잖아요. 사회생활도 대학 나온 애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한수정은 학력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력이 좋은 사람들이 모두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학력이 안 좋다고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

미래의 자동차 튜닝숍 사장인 스물세살 대학생 전수찬이 옆에서 거들었다. 지금은 전문대 자동차학과에 다니는 전수찬이 특성화고 졸업 뒤 스키장 보드강사를 할 때 생긴 일이다. “서울에서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가 경남 양산까지 내려와서 알바를 했어요. ‘오! 일 똑 부러지게 하겠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일을 못 하는 데다 농땡이까지 부리는 거예요. 그냥 ‘학교 부심’만 셌어요. 뭐 어쩌라고. 그래서 그냥 그만둬 달라고 했어요.” 한수정이 추임새를 넣었다. “대학이랑 스키장 일이랑 무슨 상관이지? 대학 다니면 일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나와서 잘할 수 있는 일도 있겠지만, 대학을 나온다고 모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는 일을 잘하거나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한다. 그게 한수정과 전수찬의 상식이다. 문제는 현실이 두 사람의 상식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스물두살 노동자 홍수지(가명)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금융회사에서 일했을 때 고졸과 대졸의 연봉 차이를 실감했다. “사실 다른 사람 연봉을 알기 어려운데 우연찮게 알게 됐어요. 대졸이랑 제 연봉이 차이가 꽤 나더라고요. ‘역시 좀 다를 수밖에 없구나’ 느꼈죠. 게다가 한 친구가 다른 직원하고 비교해서 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성과급을 받았다고 해요. 인사팀에 물었더니 딱 고졸 때문이라고 하진 않았는데 그런 뉘앙스로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일하면서 대졸과 고졸의 능력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 적이 많았는데…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홍수지는 한국 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1~10까지 점수를 매겨달라는 질문에 둘 다 ‘10’이라고 답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학력이 결국 진급이나 연봉 협상이랑 직결되니까. 회사에서 어느 학교 나왔는지도 은근히 따지고 자기 학교 출신 챙겨주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으니 학벌도 중요한 것 같아요.”

스물세살 대학생 심정석(가명)은 인천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대형마트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심정석의 월급은 120만~130만원 사이였다. 하지만 당시 4년제 대학을 나온 동료들은 250만~280만원을 받았다. 두배 넘는 차이다. “대학교, 전문대, 고졸 출신의 출발선 자체가 달랐어요. 일단 직급부터 다르고 급여도 다르죠. 저는 홍보판촉과 물류 쪽 일을 했는데, 고졸이 더 노동강도가 센 일을 해요. 그때 대학에 가야 한다고 느꼈어요.” 심정석은 지금 전문대에서 유통마케팅학을 배우고 있다. 졸업하면 예전보다 한발쯤은 앞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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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별로 딸 수 있는 자격증도 구분짓는 사회

대졸과 고졸의 차이는 월급봉투 두께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요즘 20대’와 ‘청년’은 최소한 대학생과 동의어다. 취업 기회도 다르게 주어진다. 스물두살 노동자 안현정(가명)은 대전의 한 특성화고에서 회계와 미디어를 전공했다. 그는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로 일하는 동시에 한 회사의 사무보조로 일한다. 안현정이 만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청년은 모두 대학생이란 고정관념이 있는 듯했다. “처음 보는 모든 사람이 저를 학생이라고 불러요. ‘어느 학교 다녀요?’ ‘뭐 전공하셨어요?’ 너무 대졸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마음만 상하는 일이면 버틸만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아예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해보고 싶은 일은 대부분 ‘대졸 이상’이라는 자격 요건이 있어요. 고졸이나 학력 상관없음 공고가 나오는 걸 보면 알바가 대부분이죠. 오기로 이력서를 보내 보기도 했죠. 물론 연락은 안 왔지만….” 안현정은 컴퓨터그래픽스운용 ‘기능사’ 자격증이 있다. ‘기사’ 자격증은 대졸 이상만 딸 수 있다. 컬러리스트 기사 자격증도 마찬가지다. 안현정은 학력에 따라 딸 수 있는 자격증마저 구분 지어 놓은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화가 나지만,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결국 자신을 바꿔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안현정은 고등학교롤 졸업한 뒤 지난 3년 동안 그렇게 배웠다.

안현정은 그래서 대학에 가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전의 한 방위사업체에 취업한 안현정은 ‘남초’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 미대 입시 준비를 1년 동안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부모는 1년 더 지원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영상편집과 사무보조를 동시에 하며 등록금을 모으고 있다. “제가 빠른 년생이라 사실상 열여덟살 때부터 일한 셈이잖아요.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건 정신건강에 안 좋은 것 같아요. 방위사업체에서 일할 땐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맨날 화장실 가서 울었어요. 그 어린 나이에 월급을 160만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이 너무 커서 무서웠어요. 번 돈은 다 부모님에게 드렸어요. 오빠가 의대에 다녀서 돈이 계속 드는 상황이었고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아서 제가 집안에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일만 하고 살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 같아요.”

안현정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려는 까닭이다. “평생 디자인이나 편집만 해와서 전혀 안 해본 것을 해보고 싶어요. 대학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취업에 유리하고 말고를 떠나서 사람 됨됨이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안현정에게 대학은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을 받는 곳이란 게 그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 가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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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17명 가운데 9명 “대학 대신 취업이 낫다”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에서 만난 83명은 대학생이고 17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 혹은 창업을 하거나 무직이다. <한겨레>는 17명에게 ‘취업 대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8명은 그렇다고 답했고 9명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대학 진학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8명 가운데 5명은 ‘고졸로는 구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내놨다. 학력 차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고졸 취업이 낫다고 답한 9명의 생각은 나뉘었다. “원하는 대학에 붙는다는 장담이 모르겠지만 다 붙는 게 아니잖아요. 괜히 원하지도 않는데 가면 시간 낭비죠.” 다음달 입대를 앞둔 열아홉살 무직 조민석(가명)의 말이다. 학력 차별을 피해도 그 뒤엔 학벌 차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조민석은 안다. 안산 반월공단에서 일하는 스물두살 노동자 남민수(가명)는 “주변만 보면 대학을 나와도 취업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학에 꼭 가야 하는 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통기업에서 일하는 스무살 노동자 박지은(가명)은 고모한테서 희망을 본다. “나이 차이가 두살 밖에 안 나는 고모가 있는데 특성화고 나와서 증권회사에 취직해 잘 다니고 있어요. 고모를 보면서 느낀 게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업무 능력이 있고 열심히 한다면 그렇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대학 교육과 무관한 업무 역량은 고등학교 졸업자한테도 충분히 있어요. 오히려 고등학생 때 실무를 배우니까 대학생들보다 더 잘하는 부분도 있죠.”

박지은의 말에는 토를 달 대목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전히 학력에 따른 임금 차이는 크다. 지난 5월 통계청과 여성가족부 발표를 보면, 20~24살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85만5천원인데, 학력에 따라 고졸 179만원, 전문대졸 182만4천원, 대졸 이상 201만5천원으로 층이 져 있다.(2019년 청소년 통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청년의 정의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학생 83명만 청년이다. 그중에서도 서울 4년제 대학생 16명이 청년을 대표한다. ‘조국 사태’처럼 정치·사회적 쟁점이 불거질 때 한국 사회가 발언권을 주는 청년은 ‘스카이’ 2명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17명이 살고 있다. 이 땅에서 오늘을.

김혜윤 강재구 김윤주 서혜미 기자 uniq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