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2015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을 완성하기에 앞서,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인식을 보인 일부 인사들이 교과서 편찬기준을 마련하는 회의 등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건국’ 발언 이후 교육부가 이들의 주장을 갑자기 수용하면서 새 교육과정에 ‘건국절 사관’이 담기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2015년 편찬준거 개발 자문회의 회의록’을 보면, 지난해 8월19일 경기도 과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열린 자문회의에서 자문위원 12명 가운데 불과 2~3명의 소수 위원이 뉴라이트 역사관을 드러내며 ‘대한민국 수립론’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이 회의는 박 대통령이 나흘 전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처음으로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발언한 직후 열렸다.
한 자문위원은 이날 회의에서 “(1948년) 당시 ‘정부 수립’이라고 한 현실적인 이유는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대한민국 수립’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문위원도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는 북한의 역사 용어이며, 광복 이후를 ‘미제 강점기’로 규정하는 함의가 있기 때문에 수정을 요구할 필요가 있고,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도 대한민국 수립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자문위원은 회의에 앞서 낸 집필기준(안) 검토 의견서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회의록에서 자문위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이 회의 한 달쯤 뒤인 지난해 9월14일 열린 역사과 교육과정 심의회에 제출한 심의본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이어 9월23일 최종고시한 ‘2015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에서 ‘대한민국 수립’을 못 박았다. 내년부터 사용될 새 역사교과서는 이 교육과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정부가 마련하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될 전망이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건국)’은 뉴라이트 등 보수 일각에서 꾸준히 주장해 온 사관으로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반헌법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교과서연구팀장은 “이전 토론회와 공청회는 물론 불과 3일 전인 9월11일 교육과정 시안 공개 공청회 자료에서도 일관되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썼던 교육부가 9월14일 교육과정 심의회 심의본부터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슬쩍 수정한 것은, (자문회의에서 나온) 일부 뉴라이트 인사의 일방적 주장을 졸속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공청회 등을 통해 수렴된 다양한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일부 위원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아니며 교육과정 심의회의 정식 심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