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2001년 심장과 허파 사이에 생긴 물혹 제거를 위해 갈비뼈를 떼어냈다. 당시 제거된 물혹에는 모래가 한 움큼 들어가 있었다. 그는 2009년 <한겨레21>과 만난 자리에서 “포철(현 포스코) 만들 때 아침 7시부터 일했다. 3~4시간밖에 안 자면서 미친 듯 일했는데, 그때 모래바람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 군인 박태준…박정희와 조우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박태준은 일본 패망 이후 부산국방경비대에 입대한 뒤 1963년 소장으로 군복을 벗을 때까지 군인으로 살았다.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그는 국방경비대 생도 시절 제1중대장 박정희 대위와 처음으로 만난다. 당시에는 어렵다고 알려진 탄도학 문제를 술술 풀어내면서 박정희 대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1957년에 박태준은 박정희가 이끌던 1군 산하 25사단 참모장을 지내면서 박정희와 더욱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이른바 ‘동지 명단’에서 박태준을 뺀 이유도 박태준을 단순한 부하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실패 시 살아남아 군을 이끌고 가족을 돌봐줄 존재로 박태준을 인식하고 있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정계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던 고인은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이듬해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 ‘철의 사나이’ 박태준 박태준 인생의 황금기는 포항제철 사장 취임 이후인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60년대 우리나라는 철강산업의 불모지였다. 선철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20t 규모의 소형 용광로 8기와 용선로를 갖춘 삼척의 삼화제철소뿐이었고, 강철 생산을 할 수 있는 곳도 인천의 대한중공업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대규모 제철소를 지을 수 있는 노하우가 없었던 셈이다.

포항제철은 1970년 4월1일 착공한 뒤 3년여 만인 1973년 6월9일 쇳물을 처음 생산한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대 제철소라는 타이틀을 번갈아 획득하면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완공해 1992년 2100만t의 25년 대역사가 마무리된다.

제철소 건설 과정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는 게 당시 참여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차관 공여를 철회하면서 건설 계획이 무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박태준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을 성사시켜 1970년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다.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말하며 ‘제철보국’의 정신을 강조했다.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켜 공기를 만회한 일화나, 국외의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완공한 제철소를 3년 만에 완공하여 t당 생산원가를 낮춘 것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평가가 많다. 또 1977년 포항 3기 설비가 공기 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송풍설비 구조물에서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공기가 80% 정도 진행된 상태임에도 이를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자로서의 박태준의 면모가 드러난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기업인으로서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 포철이 우리나라 산업화의 주춧돌이 됐기 때문이다. 조선이나 자동차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포철의 존재 때문에 가능했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은 일본의 기미쓰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고, 이를 계기로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1971년 제철장학회를 설립해 장학사업의 기반을 만들고, 이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2개 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사학으로 육성한 점은 박태준이 일찌감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눈을 뜬 경영인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 ‘군부 정치인’ 이중적 이미지 박태준 명예회장은 5·16 쿠데타 세력뿐만 아니라 1980년 신군부 세력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계에 입문해 ‘친군부 정치인’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박 명예회장이 1980년 10월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신군부에 합류한 것에 대해 포스코는 그가 회사를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키고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3선 국회의원이었고 집권 민정당 대표에까지 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수세적 입장에서 정치에 입문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는 1990년 3당합당 이후 민자당 최고위원으로서 김영삼 당시 대표 최고위원과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였고, 당시 쌓인 앙금 탓에 뇌물수수로 기소되는 등 정치 역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