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정부청사 폭탄테러와 우퇴위아섬 학살로 적어도 76명을 사망케 한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사진) 의 범행 동기와 성장 과정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범행 사흘이 지나도록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점도 많다.

그는 체포 당시 경찰을 보자마자 저항하지 않았고 도주하려는 시도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총기난동범이 자살하거나 경찰에 사살당하는 데 비춰 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영국 범죄심리학자 데이비드 윌슨은 영국의 <스카이뉴스>에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말처럼, 브레이비크는 25일(현지시각) 열리는 첫 재판에서 ‘템플기사단’의 옷을 입고 범행 이유를 노르웨이와 전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변호사를 통해 요청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1살 때 이혼했지만, 그는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어린 시절의 그는 힙합을 좋아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무슬림이었던,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전했다. 현 노르웨이 국왕과 왕자가 나온 명문고를 다닐 정도로 공부도 상당히 잘했으며, 친구들은 조금 반항적이지만 조용하고 명석했던 소년으로 기억했다. 다만 아버지가 재혼해 프랑스로 떠나고 의지하던 누나마저 미국인과 결혼해 노르웨이를 떠나자 상당히 힘들어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극우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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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사상에 대한 호기심은 과격한 테러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간다. 범행 몇 시간 전 인터넷에 올린 ‘2083: 유럽 독립 선언’에서 브레이비크는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이 무슬림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이라며, 이것이 사상 전환의 계기가 됐다고 썼다. 그는 적어도 10년 가까이 이번 범행을 준비했다. 2002~2006년은 범행을 위한 돈을 버는 시기로, 2009년부터는 실질적인 범행 준비 기간으로 묘사돼 있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도 2009년 구입했다. 루거 미니 14 반자동 소총과 글록 권총도 무기 구입 목록에 있는데, 이 총이 실제 범행에 사용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영국 <인디펜던트>가 전했다.

또 “공격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충분하지 않은 것보다는 너무 많은 것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격에 대한 사상적 충격을 의도한 만큼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선언문의 글귀는 끔찍한 테러에 대한 브레이비크식 ‘변명’이다.

심지어 그는 우퇴위아섬 범행에서 일반 총알이 아닌, 인체 내부를 손상시키는 특수탄환 ‘덤덤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덤덤탄은 목표물에 맞으면 탄체가 터지면서 납 알갱이 등이 인체에 퍼지게 만든 탄환이다. 희생자를 치료중인 랑에리케병원의 콜린 풀 외과과장은 <에이피>(AP) 통신에 “총알이 신체 내부에서 폭발했으며 환자들은 끔찍한 내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언문의 표지를 템플기사단의 표시인 빨간 십자가로 꾸미고 선언문의 상당 부분을 기사단에 대한 설명으로 채우는 등 그 자신을 템플기사단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템플기사단은 십자군 원정 시절 크게 활약한 대형기사단으로 프리메이슨의 전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에이피>(AP) 통신은 유럽 보안당국이 템플기사단이라는 단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고 24일 보도했다. 영국 사법당국은 브레이비크가 접촉했다는 극우단체 ‘영국 수호 연맹’(EDL)과의 연관성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브레이비크의 1500여쪽짜리 선언문은 1980년대 16차례의 폭탄소포 테러로 미국을 공포에 빠뜨렸던 ‘유나바머’의 선언문을 상당 부분 베껴쓴 것으로 드러났다. 또 그는 선언문 곳곳에서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이를 페미니즘이 퍼지는 바람에 여자들이 고분고분해지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가부장적 문화를 “유럽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